얼마전 "덕혜옹주" 라는 영화가 이슈가 되면서
급 조선시대말기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찾아보게
되었답니다. 그 중에서 올라올라 정조시대까지 올라가봤는데,
역시 조선시대 말기는 세도정치 때문에 망했다고
얘기할 정도로 왕권은 약해지고, 한가문이 권력을 휘어
잡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죠.
그 중에서 왕비를 어느 가문이 가져가냐에 따라
외척세력이 모든 정사에 포진이 되고 안되고가
결정 될 정도로 조선시대 왕비간택은
중요한 국가 행사중에 하나 였던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는 전국의 팔도미녀들을
모두 데려와 공정한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의
절차를 진행하면서 뽑는것이 원래의 방식이죠.
그만큼 조선시대 왕비간택은
신중한 절차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에 뽑힌 사람은 거르고 걸러서
뽑인 여인이기에 조선 최고의 여인이라
자부 할 수 있는 것이었죠.
하지만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의 팽배로
이미 내정자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대표적인 가문은 안동 김씨가문과 풍양 조씨가문
두 가문이 지속적으로 대립을 하면서
조선의 국력을 깎아먹지 않았나 싶어요.
대부분이 왕비간택에서 나이를 속이거나
몰래 혼인을 시켜서 왕비간택을 피한건
그만큼 많은 비용과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기에
오히려 권세가문의 눈치를 보는 쪽 같은 경우에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럼 이런 조선시대의 왕비간택 기준은
의외로 지금의 미적 기준과는 조금 다를수도 있답니다.
조선시대 왕비간택에서는 용모도
상당히 큰 비중중에 하나도 보았기 때문에
해당 용모기준에 맞게 뽑았답니다.
그래서 몇몇 미적기준이 안맞는
여인들은 간택에서 용모때문에 떨어지기도 했죠.
하지만 가장 크게 보는것은
만인의 어머니라 불리는 왕비간택이기에
가지고 있는 성품과 현명함을 가장 크게 보았죠.
하지만 이는 원래 규정상의 조선시대 왕비간택이며,
조선말기에 와서는 이 마저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고,
권력을 가진 가문에서의 여식을 왕비로 하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왕비간택이 이만큼 복잡하고
신중한 절차를 따랐다는 것은 그만큼 왕비간택자체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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